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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습관 고치기: 반조의 주요성

20세기 초 미국은 금주령 시대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대학생 두 명이 기숙사를 빠져나와 어떤 술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에 있는 포스터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인근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집회였습니다. 한 명은 무디 목사의 집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귀한 기회니 집회에 참석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술 마시러 기왕 나왔으니 주말을 바에서 즐기자고 했습니다. 그 날 저녁 한 명은 교회에서, 다른 한 명은 바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후 4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날 부흥회에 참석한 청년은 어떤 각성이 있어서 인생 방향을 새로 정립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미국 23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회고록에 “그 날 저녁 그 집회에 가지 않았다면 내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날 술집에 간 그 청년은 과거 룸메이트였던 자기 친구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스턴의 어느 감옥에서 신문을 보고 알게 됩니다.   우리 운명은 순간순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배우자, 직업 등의 선택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사람들의 선택 70%는 그냥 습관에 따르는 것이라 합니다.  부지런한 것, 게으른 것, 일찍 일어나는 것, 늦게 일어나는 것, 말을 많이 하는 것, 적게 하는 것, 남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 무엇을 미루는 것 등 우리 행동의 태반은 습관입니다.   습관의 사전적인 정의는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 바로 우리 모습이다. 탁월함이란 어떤 행위라기보다 습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습관은 길들이기 어렵고 나쁜 습관은 쉽게 길듭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성품은 원래 선악이 없는 것이나 습관에 따라 선악의 인품이 있어지나니 습관은 곧 당인의 처음 생각이 좌우의 모든 인연에 응하고 또 응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좌우의 인연을 따라 습관 되는 이치가 선과 악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나, 선한 일에는 습관 되기가 어렵고 악한 일에는 습관 되기가 쉬우며, 또는 선한 습관을 들이기 위하여 공부하는 중에도 조금만 방심하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악한 경계에 흘러가서 처음 목적한 바와는 반대로 되기 쉽나니 이 점에 늘 주의하여야 착한 인품을 이루게 되리라.”   습관은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기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우리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처마 밑에 떨어지는 물이 결국 아래에 있는 바위에 구멍을 내듯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버릇이 실제 여든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까지 유전되기에 십상입니다. 전생의 습관과 성격이 금생 혹은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교의 대성(大聖) 증자님께서는 ‘하루에 자기를 세 번 돌아보는 것(一日三省)’을 당신 수행 기조로 삼았다고 합니다. 개구리가 멀리 뛰려면 일단 움츠려야 하듯 ‘반조(反照)’ 없이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고 진보시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당신의 친저‘원불교 정전’에서 매일 모든 수행자가 ‘반조’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에 실행이 되었는가 못 되었는가를 대조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주요성 습관 습관 되기 소태산 대종사 인생 방향

2025-01-16

[삶과 믿음] 하늘로 간 기도 동역자

누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날은 12월치고는 따뜻했지만, 잔뜩 흐렸다. 허겁지겁 먼 길을 달려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한 병원 신경과학 중환자실에서 만난 누나는 혼수상태로 산소호흡기를 달고 여러 개의 주사를 맞고 있었다. 아무 반응이 없는 누나는 기계에 의지하여 숨을 이어갈 뿐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수많은 기계가 시시각각 그의 상태를 점검하는 중에 산소와 알지 못할 약물들이 희망을 희석하더니 끝내 누나는 깨어나지 못했다.   하루를 지나 겨울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매형과 가족들이 모여 연명 치료를 중단하기로 동의했다. 산소호흡기가 제거된 후 14분이 지나자, 누나의 상태를 보여주던 모든 그래프가 수평선으로 바뀌었다. 조금씩 낮아지며 애태우던 숫자들이 파르르 떨며 꺼지더니 병실로 어둠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슬픔보다 더 큰 이별의 무게가 우리를 누르고 있었다. 누나는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날까지 친지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써서 보냈다. 워싱턴에 사는 아들은 고모가 병원에서 숨을 거둘 때 임종하고, 장례식 전에 집에 다녀온다고 갔다가 고모가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를 집에서 받았다며 또 통곡했다.   나보다 세 살 위의 누나는 사십여 년 전에 미국에 이민을 왔다. 그리고 부모님을 초청하고, 우리 형제가 다 미국에 자리를 잡는데 넉넉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신앙심이 깊어 이민 초기에 아버지를 도와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고, 찬양을 좋아하고 잘해서, 집이나 교회에서 찬양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교회 성도와 이웃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해서 인근에 누나의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누나가 출석하던 교회는 매년 아이티 후원 헌금을 한다. 지난해 가을, 올해에는 예년보다 많은 헌금이 되었다며, 누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이티 고아들을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했다. 우리는 새해 1월에 누나의 교회를 방문하기로 약속했었는데, 누나는 성탄절을 불과 일주일을 앞두고 교회 회중 앞에 차갑게 누운 것이다. 장례 예배는 조문객들이 큰 예배당을 가득 메운 채 진행됐다. 모두 너무 놀라며 한결같이 슬퍼했다. 매형에게도 누나의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누나의 빈자리는 참 클 것이다. 그러나 누나는 나에게 가장 큰 빈자리를 남기고 갔다.   아이티 사역을 하면서 아내와 어머니와 누나의 기도가 큰 기둥이 되어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우리 아이티 사역을 더욱 세세히 묻고 기도했다. 아이티에 가면 가는 대로, 못 가면 못 가는 대로,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서로 기도의 파트너가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로에게 기도의 동반자였던 누나를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작스레 하늘 찬양대로 부르신 것이다.   아이티가 갱단에 의해 폭력적 상황이 되어가고 있을 때, 일주일에 서너 번씩 누나는 텍스트 메시지로 아이티 상황을 물어왔고, 기도했다. 그렇게 가까이서 기도해 주던 기도의 동역자가 너무 서둘러 하늘로 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누나가 천국에서도 여전히 우리와 아이티 고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리라 믿지만, 준비 안 된 이별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그러나 지금도 수많은 기도의 동역자가 있어 그분들의 기도로 아이티 고아 구호 사역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하늘로 데려간 누나를 대신하여 사랑하시는 고아들을 위해, 앞으로 더 많은 기도의 동역자를 보내주시리라 믿는다. 우리 사역은 기도가 아니면 헤쳐 나갈 수 없는 일이므로.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동역자 하늘 기도 동역자 아이티 고아들 하늘 찬양

2025-01-09

[삶과 믿음] 그래도 믿습니다

아이티는 지금 유배지처럼 격리되어 있다. 미국 연방항공청의 민항기 운항 금지 조치가 3개월 연장된 후에, 공항은 문을 열었지만, 민간인의 미국으로 출국도, 아이티로 입국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수도 포토프린스에서 타지로의 이동은 막혀 있다. 마이애미행 비행기가 있는 아이티 북부 캡 헤이션까지는 거액의 비용을 내고 민간 헬기를 이용할 수 있지만 아무나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고립 탓에 아이티는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절대적 부족 현상을 겪고 있고, 1100만이 넘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영양실조 상태라고 WHO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수십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는 가운데, 갱단의 점령으로 이미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잃고 떠돌고, 올해에만 6000명 이상이 갱단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이제는 납치가 얼마나 일어났는지 숫자를 헤아리지도 않고 있다. 몇 개 남지 않은 병원이 갱들의 공격으로 초토화되고, 경찰서는 여전히 공격받고 유엔에서 파견한 경찰도 갱들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밀리고 있다.   전 세계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사이에, 나라는 결딴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리는 총소리에 사람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의 공포를 머리에 이고 거리를 뛰어다닌다. 일상이 위협받고 무너진 지가 너무 오래되어 사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게 되었는데 그사이에 고아원은 고립무원의 지경이 되었다. 늘 부족한 식량은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인내를 시험하고 있고 학교는 문을 닫아 아이들은 여전히 뜨거운 햇볕 아래 더디 가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   예수 믿는다고 다 편안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은 예수를 믿는 성도도 같이 겪는다. 그런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때로 믿음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고난을 견디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하지만 밤낮으로 콩 볶는 듯한 총소리를 들으며 생존이 위협받는 공포를 고스란히 맨몸으로 견디는 아이티 사람들에게 폭력과 굶주림의 두려움은 믿음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믿음은 상황을 바꾸는 기적의 열쇠가 아닐 수 있다. 그래도 믿음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도록 붙들어 준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갱단의 위협 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아이티 고아들과 함께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남은 소망의 믿음이 하나님께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며, 고난 속에서도 함께하시라는 믿음을 우리가 아직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한 파도 같은 폭력의 공포와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끼니의 두려움과 쉬이 떠나지 않는 질병 가운데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아이티의 고아들이 믿음 안에서 고난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또한, 아무리 상황이 나빠져도, 아니 상황이 나쁘니 더욱, 우리는 우리의 지원을 통해 아이들이 꿈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갱단의 위협 속에서도,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도,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우리가 지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악몽 같은 한 해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새해의 소망을 꿈꾸고 있다. 배가 고파도 꿈꾸며 기도할 수 있으니, 우리는 부족한 식량을 간신히 채우며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 그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아이티로 입국 아이티 고아들 아이티 북부

2024-12-26

[삶과 믿음]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

  필자는 중학교 시절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1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그 영화 주제곡을 듣고 어떤 무상함이 강하게 일어났고, 내가 누구이며 과연 마음의 실체가 무엇일까 하는 답답함과 강한 의심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무상한 경계를 대할 때마다 그런 의심과 답답함이 일어났는데, 당시 필자의 심경은 마치 좁은 통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의심이 해결되기 전까지 그 좁은 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외적 구속이건, 내적 구속이건 내가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도 결코 내 ‘마음’으로 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필자가 원불교로 출가하고 난 후에야 그 좁은 통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고,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야만 그 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고요해지고 번뇌가 사라지면 이런저런 의심이 생깁니다. 이는 마치 호수의 물결이 잠잠해지면 호수 밑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진리가 우리를 참 고향으로 오라는 부름이자 손짓입니다.   다음은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입니다.   “수도하는 이가 큰 발심이 나 가지고 공부가 어느 정도 깊어지면 자연 큰 의심 하나가 생겨나서 일체 의심이 그 의심 아래 잠을 자고, 자나 깨나 보나 들으나 어묵동정이 다 의심으로 화하여 온 천지가 그 의심 안에 들어 있다가 홀연히 한 생각을 얻어 그 의심을 부수고 나면 일체의 의심이 다 풀어지고 그로 좇아 참 지혜가 발하나니, 지금 그대들 가운데 보고 듣고 생각해서 아는 지혜는 참 지혜를 얻어 들어가는 첫 문에 첫걸음이 되나니 그것으로써 만족하지 말라.”   수도인에게이런저런 의심이 생기다가 나중에는 그 의심들이 하나의 큰 의심으로 귀결된다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강물이 결국 하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불교 수행인들에게 궁극의 의심은 주로 ‘이뭣고’가 됩니다. 내가 말하고 보고 생각하는 그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의심입니다. 우리는 이를 마음, 의식, 성품 등이라 말하지만 이는 단지 하나의 개념일 뿐 우리는 그 실체를 정확히 모릅니다. 큰 의심이 걸리면 그 의심을 통해 큰 입정에 드는 것입니다. 큰 의심이 있고 난 뒤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큰 의심이 있는 뒤에 큰 정성이 나고, 큰 정성이 난 뒤에 크게 깨달음이 있으며, 깨달아 아는 것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통 만통이 있나니라.”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선진포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다 저절로 입정에 들어 온종일 그대로 서 계신 적이 있습니다. 큰 의심이 걸려 대정(大定)에 든 것입니다. 만공 스님께서도 스승님으로부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화두를 받고 처음에는 이를 그냥 개념적으로 되뇌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이가 참으로 깊은 의심이 되었고, 그 의심 속에 먹고 자고 걸어가는 것을 거의 잊을 정도의 동정 간 입정이 몇 달 지속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부엌에서 밥을 하다가 불붙은 나무가 ‘딱’ 하며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일체의 의심이 해결되고 깨달음을 얻었다 합니다.   큰 의심을 통해 큰 정(定)에 들고 이가 깨달음의 경로입니다.     그러나 보통 수도인에게는 이런 의심이 깊게 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많은 선지식은 제자들에게 어떤 진리적인 의심거리를 주었는데 이를 ‘화두(話頭)’라고 합니다. 화두를 때때로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공안은 글자 그대로 ‘관공서의 공식문서’라는 뜻입니다. 관공서의 법적 문서처럼 공안이 공부의 기준, 깨달음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선가의 대표적 화두 혹은 공안입니다. 한 수행자가 중국 조주 선사에게 “인도의 달마대사가 서쪽 즉 중국으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마침 뜰앞에서 있었던 조주 선사는 “뜰앞의 잣나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한 학인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살아있다고 하셨는데 개에게도 과연 불성이 있을까 그 학인은 의심이 되었나 봅니다. 조주 선사는 “무(無), 즉 없다.”고 답했습니다.   학인들의 어떤 물음에 대해 선지식들이 진리를 직관적으로 바로 학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답을 제시해 왔습니다. 선지식들의 이러한 답은 엉뚱한 답, 비논리적인 답변으로 보이는데, 이는 생각 논리로서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많은 화두가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화두는 근본적으로 수수께끼와 다릅니다. 수수께끼의 답은 생각으로서 논리적 사고로서 얻을 수 있지만, 화두의 해결은 생각이 끊이진 자리에 들어가야 그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라는 말이 화(話), 즉 말과 글과 생각 이전의 자리(머리 頭)라는 뜻입니다. 말과 생각 등 모든 관념 이전의 세계로 들어가야 성품을 본다는 것입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마음 자유 의심 하나 의심 아래 마음 의식

2024-12-19

[삶과 믿음]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뜻에 비추어 본다면 그에 걸맞지 않게 심한 고난의 역사를 산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의 생애는 평탄하지 않았고, 손자 야곱의 때에는 모든 가족이 이집트로 이민을 갈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에 놓인다. 야곱의 후손은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심한 노동착취와 온갖 차별을 당하는 노예로 생존한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큰 민족을 이루고 이집트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도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 앞 광야에서 40년의 노숙을 거쳐야 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값이라고 하지만, 사사들의 시대에 외세의 침략을 여러 모양으로 당해야 했다. 왕이 세워지고 평화를 누린 시대도 있지만 끝내 강대국의 침략으로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는 숨 막히는 고난을 겪기도 한다.   로마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이스라엘은 마침내 나라를 완전히 잃고 2000년 동안 전 세계를 떠돌게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예수 탄생은 곧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임하는 것이다.   아이티는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가슴 답답한 지경에 놓여 있다. 11월 초 갱단이 민간항공기에 총격을 가해 공항이 폐쇄된 이후 각 항공사는 내년 2월까지 비행을 중단했다. 지난 3월에 이어 두 번째 공항 폐쇄이고 고립이다. 갱단의 위협이 멈추지 않는 땅에 모든 이들이 갇혀 있는 것이다. 항만이 갱단에게 점령되어 식량, 석유 등의 공급이 시시때때로 멈추고, 갱단 점령지역이 확대되고 있는데 유엔 경찰조차 갱들과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는 형편이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전쟁에 가려져 아이티의 상황은 세상에 전달되지 않고, UN도 수도 포토프린스의 사무실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북부지역으로 옮긴 지금,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땅에서 백성은 보호받지 못하고 수십만 명이 살던 집을, 떠나갈 곳을 잃고 거리를 헤맨다. 갱단의 폭력으로 말미암은 희생자는 해마다 수천 명씩 발생하고 납치는 일상이 되었다. 이제는 10대 아이들을 잡아다가 갱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가운데는 먹고 살길이 없어서 스스로 갱이 되는 아이들도 있다. 갱단의 심한 공격이 있던 이삼 주 동안 문을 닫았던 학교에 아이들이 다시 다니면서 학생 신분을 표시 내지 않으려고 교복을 입지 않고 다니는 슬픔도 있다.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는 고아원은 상황이 더 심각하여 식량도 식수도 자주 바닥이 나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다. 겨울바람보다 가슴 시리고,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는 좁은 굴에 갇힌 것같이 답답한 시간만 흐르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대강절이다. 곧 성탄의 기쁨을 나누느라 온 세상이 반짝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티는 여전히 총소리로 낮과 밤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아이티의 이 길고 긴 고난의 까닭도 앞날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물 적신 기다림의 기도뿐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의 평화가 아이티 땅에도 임하길, 일상이 평온을 회복하길 기다리고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다. 평화가 기적처럼 임하길 기도하고 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편 40:1)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전쟁 이집트로 이민

2024-12-12

[삶과 믿음] 감사는 표현될 때 완성된다

이 년 전 여름, 살렘고아원 원장 쟌 목사가 식량을 가지러 와서 커다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쟌 목사가 내민 봉투에는 컬러로 인쇄된 감사장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불우한 어린이들을 조건 없는 사랑으로 지원해 준 공로를 치하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아들을 사랑해 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뜻을 근사한 디자인의 감사장에 담아 온 것이다. 이 감사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오래된 노트북으로 디자인을 찾아보고, 거기에 맞춰 이름을 넣고, 그 파일을 가지고 컬러 프린트해 주는 곳에 가서 프린트했을 텐데, 짐작에 족히 10달러는 들었을 듯했다. 그 돈이면 웬만한 근로자 이틀 치 일당이 된다.   짐짓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나무라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활짝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런 돈을 뭐 하러 쓰느냐고, 앞으로는 절대 이런 것을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고마움을 알고, 그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말로만 하지 않고 비록 종이 한 장이지만 정성을 들인 멋진 감사장이 긴장하며 아이티에 가는 우리 마음을 밝게 해주었다.   사랑과 감사는 마음에 품은 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이티 고아들을 사랑하신다고 믿기에, 그 사랑을 전하고 표현하기 위해, 쉬지 않고 고아들을 먹이고 가르치려고 애쓴다. 지금은 미국의 연방항공청이 민간항공기 운항을 중지시켜서 오가지 못하고 있지만, 아이티가 지난 수년간 갱들의 난동 속에 위험하고 슬픈 땅이 되었어도 우리가 쉬지 않고 아이티에 가고, 식량을 공급하고, 학업을 돌보는 것은 오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된 사랑은 공포와 좌절의 땅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꿈에 버팀목이 되어준다.   마찬가지로 감사도 표현하는 것이다. 살렘고아원 쟌 원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한 우리의 사랑에 귀한 감사장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가끔 고아원 아이들이 단체로 감사 카드를 만들어서 보내주곤 한다. 아이들이 끙끙거리며 괴발개발 그림을 그리고, 알아보기도 어려운 글씨로 쓴 감사 카드를 받아 들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고마움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이 아이들을 돕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자 다짐한다.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의 호의나 사랑에 빚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른 이에게 사랑을 나누고 호의를 베풀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처럼 우리 역시 타인의 사랑과 배려 가운데 살아간다. 그 사랑의 빚을 알고 표현하는 것이 감사이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이나 감사는 완성되지 않는다.   다음 주 목요일은 추수감사절이다. 가족들이 모여 한 해 동안의 삶에 대한 감사를 나누는 큰 명절이다. 많은 교회가 이번 주일을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킨다. 지난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은 시간은 없다. 모든 것이 절망과 공포 가운데 있는 아이티에서도 우리는 감사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감사는 표현하는 것이다. 고맙다면 고맙다고 소리내어 말해야 한다.   작은 표현 하나가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번 감사절에는 우리 삶에 빛을 비춰준 이웃과 가족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그동안 전하지 못한 감사를 표현해 보면 좋겠다. 살아오면서 받은 풍성한 사랑과 호의와 배려에 비해 너무도 부족했던 감사를 정성스레 표현할 때 우리의 사랑과 감사는 관계를 더욱 빛나고 풍성하게 하고 세상은 더욱 환해질 것이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감사 표현 감사장 하나 감사 카드 이번 감사절

2024-11-21

[삶과 믿음] 진리적 의심과 깨달음

100여년 전 원불교 창시자이신 소태산 대종사를 어떤 한 사람이 찾아와 대종사께 물었습니다. “저는 항상 진세(塵世)에 있어서 번뇌와 망상으로 잠시도 마음이 바로 잡히지 못하오니 그 마음을  바로 잡기가 원이옵이다.” 대종사께서는 다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바로잡는 방법은 먼저 마음의 근본을 깨치고 그 쓰는 곳에 편벽됨이 없게 하는 것이니 그 까닭을 알고자 하거든 이 의두(疑頭)를 연구해 보라.” 하시고 “만법귀일(萬法歸一) 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오”라고 써 주셨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마음 안정을 원하는 사람에게 명상 등 수양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소태산 대종사께서 그분께 의두, 즉 진리적인 의문 거리를 연마해 보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의미 깊습니다.   필자는 20대 중반 원불교 교학과 학생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이마에 부스럼 돌기 같은 것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붉게 된 부분이 가렵기 시작했고 이마가 흉하게 되었습니다. 피부과를 찾아갔고 조직검사까지 하였으나 의사 선생님께서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아마 어떤 바이러스 혹은 박테리아 감염이 원인이 아닌가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사가 권하는 약을 먹고 처방된 연고를 두 달간 발랐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방학이 되어 어떤 한의사를 찾아갔습니다. 한의사는 저를 진맥해 보더니 제 몸이 너무 피곤한 상태이며, 이마의 돌기는 피곤으로 인해 화기(火氣)가 얼굴로 올라와 생긴 것 같다고 하며 화기를 내리고 수기(水氣)를 강하게 하는 한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약을 먹는 것이 주요한 것이 아니라 잘 쉬는 것이 우선이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두 달 정도 잘 쉬고 나니 이마에 돌기가 저절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에는 피상적 원인이 있고 근원적 원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바이러스가 제 이마에 돌기를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이가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만) 피상적 원인이며, 돌기의 근본 이유는 제 몸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화나는 마음, 요란한 마음, 어리석고 그른 마음, 비교하는 마음 등 우리는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것의 피상적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근원적 원인은 우리가 마음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마음의 근본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바로잡기를 원하면 마음의 근본을 깨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경계에서 해탈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마음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 서울 박람회에서 화재보험 회사의 선전 시설을 보시고 한 감상을 얻었다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항상 말하기를 생사고락과 해탈을 하자고 하지만 생사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해탈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니….” (천도6)   예수님께서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8:32) 진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인생의 제반 고통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나는 방법은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합니다. 불교(佛敎)의 불(佛)자는 ‘깨칠 불’ 혹은 ‘깨달을 불’입니다.     진리란 우주만유의 본원이자 우리의 본성입니다. 진리를 깨치는 것, 즉 우리 마음의 실체를 아는 것을 불교에서는 견성(見性), 즉 성품을 본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의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진리에 관한 의심 없이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합니다. 문제가 없는데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깨달음 진리 진리적 의심 우리 마음 마음 안정

2024-11-14

[삶과 믿음] 관심에서 행동으로

어쩌다 만나는 분 중에 아직도 아이티에 다니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렇다고 하면 위험해서 어찌하느냐고 염려하기도 하고, 수고한다고 하기도 하고, 아직도 다닌다는 것을 꽤 신기한 일인 듯 여기기도 한다. 많은 분이 우리의 아이티 고아 지원 사역에 관심을 두거나, 우리를 만나면 궁금해하기도 한다. 이메일로 보내드리는 소식을 읽는 분들은 자주 안부를 묻기도 하고 뉴스에서라도 아이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생각이 난다며 연락을 하는 분들도 있다.   선교하는 일만이 아니라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겠지만, 그런 관심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 중에 우리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는 분들이 있고, 그 기도가 우리가 아이티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큰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관심을 두고 물어봐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힘이 날 수밖에 없다. 관심은 사랑을 품고 있고 관심이 있을 때 기도하게 된다. 기도 자체가 관심이기 때문이고, 우리 사역 또한 따듯한 관심 속의 기도로 힘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도는 세상의 많은 일에 관심을 둬야 한다. 그리고 그 관심은 기도로 이어지고 나아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관심을 두고 살펴야 일이 많다. 기후 문제가 그렇고, 여러 나라의 전쟁이 그렇고, 국민 삶의 질을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 같은 정치가 그렇다. 자기가 태어나고 살아가던 땅을 떠나 떠도는 난민이나 아이티 고아들처럼 나라가 아무리 갱단의 폭력으로 두려움의 땅이 되어도 떠날 곳도 떠날 수도 없는 사람도 관심을 두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사는 동네 가까운 곳에도 우리의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 모든 것에 깊은 관심과 기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관심에서 비롯된 기도는 한 발 더 나가 행동으로 이어져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아이티 고아이다. 우리는 관심을 두고 기도하며 도와주는 분들의 뜻을 모아 고아들이 먹고 배우며 자라는 일을 돕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도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이들이 위험하고 척박한 환경 가운데서도 자란다.   예수님은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셨다.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직접 다가가셨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다. 예수님은 행동하셨다. 성경은 언제나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가르친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품사는 동사라고 한다. 사랑이란 단순히 마음에 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과 발을 움직여 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도움이라도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큰 변화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이다. 연말이 다가오면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많은 기회를 만난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생각하고 돌보는 것은 단순한 관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난과 고통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한탄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 관심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 주변 가까이에 사는 가난한 이들은 단순한 관심을 넘어 적극적인 행동으로 도우라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 이웃이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헐벗은 형제자매에게 말로만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라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야고보서 2장 15~16절) 이제는 관심에 머물지 말고, 행동으로 나설 때이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관심 행동 아이티 고아들 아이티 이야기 기도 자체

2024-11-07

[삶과 믿음] 가장 좋은 것으로

오래전에 아이티 고아원에 스피커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식을 SNS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보고 아이티에서 사역하는 어느 선교사가 글을 올렸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데, 그냥 노래하고 말하면 되지 무슨 스피커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충전해서 사용하는 포터블 스피커를 열 개 고아원에 공급했고, 여러 해 동안 고아원에서는 그 스피커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우리가 고아원 아이들에게 닭 다리 얹은 도시락을 주문해서 먹인다고 했을 때 그 선교사가 자기는 밥을 직접 해서 먹인다며, 그게 다 밥 장사하는 사람들 배만 불리는 것이라고 했다. 왜 고아원 아이들은 닭 다리 얹은 도시락을 먹으면 안 되는지, 그걸로 돈을 번들 얼마나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인지, 그 밥장사는 돈 벌면 안 되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고, 요즘도 우리는 아이들을 센터로 초청해서 닭 다리 얹은 도시락을 주문해서 아이들과 나누고 있다. 그 선교사는 우리가 빈곤 포르노에 의지해 후원자를 선동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고아들을 향한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으로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지금은 운송이 어려워져 중단하고 있지만, 몇 년 동안 고아원에 새 옷을 일일이 세트로 포장해서 나이별 성별을 구분하여 보내주는 분도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헌 옷도 보냈는데 옷을 모을 때, 그 옷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잘 개서 가져다주는 분들이 많았다. 어떤 후원자는 자기 아이와 똑같이 자기가 후원하는 아이의 학용품과 옷가지를 챙기기도 한다. 우리가 쓰고 누리는 것을 우리와 똑같이 아이티 고아들이 다 누릴 수는 없겠지만, 아주 작은 일부라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아이티니까, 고아니까, 적당히 해주고, 아무거나 주어도 된다는 발상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우리도 실수했다. 무엇이든지 귀한 곳이니, 뭘 줘도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질보다 양이 우선이어서 특별히 좋은 것보다는 무엇이든 많이 나누려고 급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티 고아들도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식량을 공급할 때 쌀과 식용유만 지원하지 않는다. 콩과 생선 통조림도 공급하고, 설탕과 화장실 휴지와 빨랫비누도 공급한다.   아이티는 지금 전쟁터 같은 처지이다. 10월 들어 많은 마을이 갱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수십만 명이 집을 잃고 고향을 떠나고 있다. 경찰서가 공격받고, 경찰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다반사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낮이고 밤이고 총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무기력한 마음으로 아이티의 평화를 위해, 고아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여전히 고아들에게 전할 좋은 것을 찾고 있다. 공포와 혼돈의 땅이 되어 바깥출입조차 불안하지만,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라고, 잘 먹고 잘 배우자고 등 두드려주고 싶다.   물론 우리에게는 자원의 한계라는 형편이 있으니, 그 형편 안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나누고 섬기려 애쓰고 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심정으로 설렁탕을 끓인다는 어느 식당 주인처럼, 우리도 예수님께서 받으시고 잘했다고 애썼다고 고마워하실 만한 먹거리, 학용품, 의복 등을 고민한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보면, 고아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받아 마땅하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아이티 고아원 동안 고아원 고아원 아이들

2024-10-24

[삶과 믿음] 습관 고치기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늦게 일어나는 것, 부지런한 것, 게으른 것, 남을 흉보는 것, 말을 많이 하거나 빨리하는 것 등 우리 행동의 태반은 습관입니다. 습관의 사전적 정의는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행해져서 규칙처럼 되어 있는 일 혹은 고정화된 행동 양식” 입니다. 좋은 습관은 길들이기가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반면 좋지 않은 습관은 금방 길듭니다.   원불교 5대 종법사이셨던 경산 상사님께서는 “어떤 일에 성공할 것인가 혹은 내가 성불을 할 것인가를 알려면 너 습관을 봐라.”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습관이 나의 수행과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나쁜 습관이 내 인생을 망친다는 것을 알지만 나쁜 습관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을까요?   필자는 우선 좌선, 명상을 규칙적으로 하라고 권합니다. 원불교 경전을 보면 ‘좌선의 공덕’이 다음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좌선을 오래 하여 그 힘을 얻고 보면 아래와 같은 열 가지 이익이 있나니… ①인내력이 생겨나는 것이요 ②착심이 없어지는 것이요 ③사심이 정심으로 변하는 것이요 ④자성의 혜광이 나타나는 것이요…”   좌선 혹은 각종 명상을 하게 되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유혹이 적어질 뿐만 아니라, 마음의 힘을 얻어 여러 욕심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육신은 쓸수록 강해지지만 생각을 과도하게 하는 현대인에게는 마음은 멈출수록 그 힘이 강해집니다.   좌선은 ‘마음의 힘’을 얻는 최고의 방법의 하나입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모든 부처 모든 성인과 일체 위인이 다 이 선법으로써 그만한 심력을 얻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좌선 수행으로 우리 본성이 드러나면  욕심, 착심, 사심이 차차 없어지고 자성의 혜광이 비추어져서 모든 생각이 바르게 됩니다. 심리학자들도 어떤 유혹이 생기면 일단 갈등하지 말고 호흡을 고르게 하며 잠시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어서 자연스럽게 지혜가 나오고 유혹의 생각도 사라져서 바른 판단과 행동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뉴욕주 원달마센터에서는 각종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배추를 기를 때 거름을 잘 주면, 설사 배추에 벌레가 있어도 배추는 건강하고 싱싱하게 자랍니다. 명상과 선은 우리 마음 땅에 거름을 주는 것과 같이 우리 마음과 인생에 힘과 활력을 줍니다. 배추를 키울 때 거름을 줄 뿐 아니라 배추에 붙은 벌레도 함께 잡아주면 배추가 더 잘 자랍니다. 규칙적으로 하는 선과 명상이 우리 마음 밭에 거름을 주는 것이라면, 현실 가운데서 하나하나 나쁜 습관을 고치는 유무념 공부는 배추에서 벌레를 잡는 것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좋지 않은 습관을 바꾸고 자신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하나하나 고치는 것을 유무념 조항을 잡고 현실적 공부를 꾸준하면 이가 자기 인생을 바꾸는 큰 역할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급한 마음, 욕속심, 남을 판단하는 마음, 악한 말 안 하기, 자비심과 이해심을 기르기 등을 유무념 조항으로 잡고 마음공부 하고 있습니다. 이가 유무념 조항으로 되어 있으면 현실 경계에 당할 때 즉 어떤 현실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마음을 멈추고 생각하게 되어 좋지 않은 습관을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습관을 고치고 바른 취사 혹은 정의를 실현할 때 대종사께서는 “기어이 취하고 불의어든 기어이 버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어이’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꼭, 마침내, 기어코’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혹은 나폴레옹이 단기간에 세계를 제패한 이유가 그들의 훌륭한 전략 전술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어떤 사람과도 비교될 수 없는 ‘기어이’ 하고자 하는 용심, 분심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왕의 신분으로도 많은 전쟁에 직접 참전해서 결정적 순간에 최전방에서 싸웠습니다. 왕이 최전선에서 싸우니 당연히 주변에 있던 장군, 장교, 일반 군인들도 최선을 다해 싸웠을 것입니다. 이가 승리의 결정적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옆으로 길게 된 큰 모자를 쓴 이유도 전쟁에서 부하들에게 “나는 뒤에서 작전만 지휘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희들과 함께 직접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많은 전투에서 최전선에서 부하들과 함께 싸우며 지휘했기에 허벅지에 포탄 파편으로 인한 많은 흉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기어이’ 승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우리 마음공부 혹은 신앙 수행은 마음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입니다. 이 세상 전쟁 중에서 마음 나라의 일어나는 전쟁이 가장 큰 전쟁이고 근본되는 전쟁이라고 대종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습관 습관 고치기 우리 마음 좌선 명상

2024-10-17

[삶과 믿음] 우리가 살아내지 못한 죄

성경에 관해 질문이 많은 성도를 만났다. 이번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문제와 함께 오늘날 세상을 개탄하며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느냐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이렇게 악한 죄가 가득한 게 말이 되느냐며 짐짓 한탄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정말 걱정이 되느냐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왜 그러냐고 그가 눈으로 물었다. 우리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해서 세상이 이렇게 당신이 염려하는 죄로 가득 찼다고 대답했다.   초대 교회는 아무 힘이 없었다. 권력도 없었고 부도 없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부흥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삶으로 예수를 보여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있었다.   우리 어릴 때도 그랬다. 아주 오래전 시골 어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자기 아이들이 예배당에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래도 가서 좋은 소리 듣고 오라고 했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도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나쁜 말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예수 믿는 것들이 더 나쁘다는 소리가 일상의 평가가 되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주신 마지막 명령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전도이고 선교다. 그런데 그 선교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하지 않는다. 선교의 가장 강력한 도구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말씀대로 잘 사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 자신들과 다를 때, 그것이 매력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존중하고 궁금해할 터인데, 우리의 삶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삶과 다르지 않으니,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삶을 궁금해할 일도, 존중할 일도 없고 나아가 복음을 들을 내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살아낸, 가난하지만 행복하고, 힘없지만 담대한 삶은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는 가장 큰 힘이었는데, 우리는 넉넉한 부와 부족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도, 행복하지도 당당하지도 않다.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교회의 탐욕을 지적당하고, 교인들의 행태가 비웃음당하고, 복음이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 당한다.   그 모든 일이 성도가 잘 못 산 탓이다. 내 삶이 예수 안에서 반듯하고 가치 있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를 무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이들이 탐욕을 이루려 부패하고 타락하고, 문란하기에 그들이 믿는 복음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이 잘못되어가고, 세상에 죄가 번성한다고 한탄하며 손가락질하기 전에, 성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왜 전도가 안 되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선교는 강요와 회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한다. 읽고 감동할 수 있는 편지인지, 아무 가치도 없이 비웃음당하고 구겨져서 버려지는 편지인지는 성도의 삶에 달려 있다.   교회에 은과 금은 가득 쌓였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일으키는 능력은 사라진 지 오랜 시대에,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한탄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나는 나에게 묻는다. 성경은, 그리고 세상마저도 오히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한 죄를 묻고 있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예수 그리스도 초대 교회 오래전 시골

2024-10-10

[삶과 믿음] 우리가 필요 없어지는 날을 꿈꾸며

아이티 대지진이 일어난 2010년 이후부터 지원하기 시작한 러브고아원의 원장 사라는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 출신이다. 처음에는 두세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들 여덟 명을 아주 작은 집에서 돌보았다. 아이들을 정성으로 돌보다가 두 해쯤 지나서 아이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고아원은 맞은 편에 있는 마당이 아주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얼마 후 러브고아원은 마당에 임시 건물을 세우고 학교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아원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치려고 시작했는데, 곧 동네 아이들을 저렴한 학비를 받으며 학생으로 받았다. 우리는 열심히 식량을 나르고, 필요한 학용품을 공급하고, 휴대용 스피커와 시청각 교재 등 여러 가지 학교 용품을 지원했다. 그와 동시에 사라 원장은 남편과 함께 여러 외국기관을 찾아 연결하고 도움을 받으면서 학교를 확장하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언제 가보아도 아이들은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고, 조금씩 학년을 구분하면서 반을 늘린 학교는 일반 학교와 다름없이 잘 운영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우리는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고, 학교를 잘 운영하는 러브고아원을 더는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하나다. ‘매우 잘하고 있어서’이다. 캐나다의 한 기관에서 학교 건물을 크게 지어주기로 했고, 학교를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자립에 가까운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이후이다.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열심히 식량을 공급하고 고아원과 학교가 필요한 물품들을 나름대로 부지런히 공급하면서 우리는 사라 원장의 부모가 되었고, 사라는 우리의 딸이 되었지만, 우리는 이제 그 여력을 다른 고아원에 쏟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사라 원장을 다시 만났을 때, 정말 펄펄 뛰며 반가워하던 그녀는 코로나 이후에 매우 힘들어졌다고 어려움을 하소연하면서도 여전히 씩씩했다.   고아원은 자립할 수가 없다. 한때 고아원에서 염소를 키워보기도 하고, 닭을 치기도 했고, 망고나무라도 심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과를 낸 것이 없었다. 고아원은 자급자족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비록 아직도 외부의 도움을 일부 받고 있고 우리도 극히 일부의 식량을 다시 돕고 있지만, 사라 원장은 우리 도움이 없어도 될 만큼 열심히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지원을 끊은 이유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배웠다. 세상에는 필요한 사람과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없어야 할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예수님은 성도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심으로 아이티를 위하여 우리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이티에서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기를 늘 꿈꾸고 있다.     한국이 많은 외국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다가, 이제는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듯이, 아이티도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른 나라에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리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고아들의 배고픔을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고아들의 앞날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안전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나라 고아들 한때 고아원 고아원 아이들

2024-09-26

[삶과 믿음] 큰 욕심, 작은 욕심

어떤 여자분이 결혼식을 앞두고 결혼식 당일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 몇 개월간 다이어트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 여자분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기에 그동안 실패했던 다이어트가 결혼식을 앞두고 성공적으로 이행된 것입니다. 날씬하게 보여야 한다는 큰 욕구가 음식에 대한 욕구를 잠재워 버린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진리적인 참된 큰 욕심이 발하게 되면 세상으로 향하는 작은 욕심이 잠잠해집니다. 필자도 출가한 후 진리를 알고 믿고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이 바뀌었으므로 세상 것에 끌리는 마음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다음은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한 제자 여쭙기를 무슨 방법으로 수양하여야 오욕을 다 없애고 수도에 전일 하여 부처님과 같이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욕심은 없앨 것이 아니라 도리어 키울 것이니,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 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잔잔할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 (수행 36)   어떤 목적지에 빨리 그리고 반드시 도달하려는 마음, 목표의식이 분명하면 이런저런 휴게소에 들리거나 그곳에서 너무 많이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 진리적 목표가 뚜렷이 세워지면 우리 마음이 안정되고 삶에 중심이 잡힙니다.     원불교 2대 종법사이신 정산 종사님께서는 정신수양과 부동심 공부를 말씀하시면서 ‘내정정(內定靜)’ ‘외정정(外定靜)’ 법문을 하셨습니다. ‘내정정’은 염불 좌선 등으로 마음을 청결히 해서 안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며, ‘외정정’은 서원과 믿음, 분심으로 마음의 중심을 잡아서 입지를 부동하게 함을 말합니다.   “외정정은 밖으로 입지가 부동하게 하는 공부인바, 첫째는 큰 원을 발함이니, 원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만 가지 세상 인연이 앞에 가로놓여도 보되 보이지 않고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기를 서가세존께 한 번 대도에 발심하매 왕궁의 낙과 설산의 고가 조금도 마음에 머물지 않듯 하는 것이요….”   부처님 말씀하시길 “내가 왕후의 위 보기를 과객같이 하면 금옥의 보배 보기를 자갈같이 하며 좋은 비단 보기를 헌 걸레같이 하노라.” (사십이장경42)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대들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억지로 없애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곳과 때에 마땅하게 써서 자유로운 마음 기틀을 걸림 없이 운용하되 중도에만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고 하며, 가벼운 재주와 작은 욕심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재주와 발심의 크지 못함을 걱정하라 하노니, 그러므로 나의 가르치는 법은 오직 작은 것을 크게 할 뿐이며, 배우는 사람도 작은 데에 들이던 그 공력을 다시 큰 데로 돌리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큰 것을 성취하는 대법이니라.” (수행 37)   진리적 큰 욕심을 발하면 작은 욕심이 자연히 잠재워집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욕심을 잠재우는 좋은 방법입니다. 원불교 3대 종법사이신 대산 종사님께서는 “부처님은 욕심이 없는 분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자기 집으로 만들려는 큰 욕심을 가지신 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지금 욕심을 참는 공부를 하는 것은 작은 욕심을 큰 욕심으로 키워 영생을 잘 살자는 것이니, 마치 좋은 과일을 얻기 위해 처음 몇 년간 수확하지 않고 열매를 모두 따 주는 것과 같은 이치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잘 살기로 하면 반드시 욕심을 절제하고 조절하고 중도를 잡아나가야 하나니, 만약 욕심을 참지 않고 일생을 마치게 되면 그 영이 땅에 떨어져 천만 갈래로 흩어져 보잘것없이 되고 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대종사께서 ‘나이가 마흔이 되면 수염에 불 끄듯 공부하라.’ 하신 법문을 받들어 마흔 살부터 더욱 금욕하고 정진(精進), 적공(積功) 하였느니라.”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욕심 마음 목표의식 대종사 말씀하시기 마음 기틀

2024-09-19

[삶과 믿음] 마중물이 되어

아이티에 있는 하우스 오브 호프 고아원에는 네 살부터 스무 살까지 스물세 명의 여자아이가 살고 있다. 그곳에 2012년부터 동생과 함께 사는 카치아나(Katiana)가 있다. 카치아나는 올해 12월이면 스무 살이 된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2년 전에 폐결핵에 걸려 학교를 일 년 쉬었다. 그렇게 학교를 쉬는 동안, 크레올이 모국어인 카치아나는 K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를 익히고 영어를 공부했다. 능숙하지 않지만, 한글로 텍스트를 보내기도 하고, 한국어로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른다. 적절한 경우에 맞는 적절한 한국말을 쓸 줄 안다. 우리와는 자주 한글 텍스트로 소통하기까지 한다. 물론 영어로도 소통할 수 있다.   카치아나는 올 9월부터 12학년을 다니게 된다. 미뤘던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다니는 것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서 어카운트를 전공하고 싶다고 한다. 공부를 잘 마치고 일을 잘하는 어카운턴트가 되어서 고아원 아이들을 도우며 살기 바란다고 했다. 지금도 아이는 같은 고아원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학교와 고아원의 모든 이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초에 아이를 만나고 나서 학교 성적, 가족관계(부모님은 안 계시지만 혹 친척이라도 있는지), 주변 평판, 아이의 소망, 열정 등을 자세히 알아본 후에 우리는 카치아나를 대학교 공부까지 시키기로 하였다.   고등학교 마지막 과정을 도와줄 후원자를 찾고, 후에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 자격을 주는 중등 과정 졸업시험(바칼로레아)에 합격하면,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아이는 이런 도움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며 아이티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 작은 사랑과 섬김이 아이의 장래에 소망이 되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최근에 우리가 건축한 고아원 마당에 있는 펌프 두 개가 다 망가져서 새로운 펌프를 설치했다. 펌프는 자주 물이 끊어지기도 하지만, 작은 바가지로 담아둔 마중물을 더하면 곧 힘을 내고 맑은 물을 퍼 올려 고아원의 살림에 생명의 물을 더하곤 한다. 그래서 고아원 펌프 옆에는 언제나 낡은 대접에 받아놓은 마중물이 있다. 마중물이 떨어지면 펌프는 물을 퍼 올릴 수가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마중물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마중물이 되어 아이들의 꿈을 응원하다 보면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듯이, 아이들의 꿈이 이루어지고, 세상이 달라지리라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의 삶에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 우리의 사랑과 희생, 친절이 마중물이 되어 다른 이들의 삶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관심과 선행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많은 이들의 삶에 풍성한 은혜의 물을 끌어 올리게 되길 우리는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카치아나의 삶에 마중물이 되기로 했다. 마중물이 되어 마음 놓고 공부하고, 좋은 직업을 가져 고아들을 돕고 싶다는 아이의 꿈이 이루어지길 응원하기로 했다. 우리가 겨우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되어 아이의 삶에 샘솟는 소망이 될 수 있을 때, 분명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삶에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생명을 더하시리라 믿는다. 우리가 마중물이 된다면 아이는 멈추지 않는 힘찬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세상은, 아이티는 변하리라 믿는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마중물 대학교 공부 고아원 펌프 고등학교 마지막

2024-09-12

[삶과 믿음] 사랑은 어렵다

고등학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된 구호팀이 탁형구 선교사님의 안내로 장애 고아원(여호와 라파 하우스)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14년 여름이었다. 휠체어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어느 허름한 집 뒤채에 약 스무 명의 장애 고아들이 방치된 채로 있던 그 처참한 환경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울기만 하다가 돌아와야 했다.   우리는 곧 장애 고아원을 제대로 된 주택으로 옮기고, 식량과 의약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현지 의사와 간호사를 통해 건강 검진을 하고, 휠체어를 보냈다. 뉴저지의 한 교회의 도움으로 2018년에는 더 큰 집으로 다시 이사했다. 서울에 계신 장로님이 장애 아동을 돌보는 열 명의 스태프에게 월급을 지급해 주셨는데, 그해 여름, 나를 만난 고아원 원장은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린 채, 스태프 월급은 자기에게 주고 더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미국의 큰 단체가 이 고아원을 전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때였다.   2019년부터 폭력 시위가 격렬해지더니 곧이어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때문에 웬만한 NGO나 선교 단체는 아이티에서 모두 철수했다. 그리고 갱단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약 2년 전, 장애 고아원의 원장이 탁 선교사님을 찾아와 미국 단체가 갑자기 지원을 중단했다고 하소연했다. 이후 장애 고아원 원장은 다시 탁 선교사님에게 식량을 받아 가기 시작했다. 지난 7월 초, 거주 중이던 집에서 렌트를 못 내 쫓겨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탁 선교사님과 함께 고아원을 방문했다.   집 안에는 이삿짐이 다 싸여 있었고, 아이들은 전부 마당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1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세 명의 스태프가 돌보는 서른여덟 명의 장애 고아들은 나이가 들었지만, 모두 영양실조 증세를 보였고,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사랑은 어렵다. 아이티에서 우리의 사랑은 자주 시험을 받는다. 쌀을 사주면 원장이 당장 돈이 급해 팔아버리기도 하고, 학비를 부풀려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학비를 보내주었더니, 학교에 등록했다며 2년 전 영수증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난 때문에 때로 정직하지 못하게 되기도 하겠지만, 거짓말이 습관처럼 되풀이될 때마다, 먹고살 만해졌다고 등 돌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8월 말에 다시 아이티에 가면 장애 고아원을 방문할 것이다. 지난 7월, 6년 만에 나를 다시 만난 원장은 기운 없이 민망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탁 선교사님과 우리는 다시 장애 고아들이 살 집을 찾으려고 한다. 장애 아동들이기에 병원이 가까이 있어야 하고, 사십 명의 장애 아동이 거주할 수 있는 큰 집이 필요하다. 아이티에서도 일 년 렌트는 만만치 않다. 시내의 웬만큼 큰 집 렌트는 일 년에 1만 달러를 훌쩍 넘는다. 지금 우리는 그 렌트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사랑은 어렵다. 큰 단체가 돕기 시작하며 상황이 나아지니 더는 우리 도움은 필요 없다고 손사래 치던 원장의 오만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도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장애 고아들의 얼굴을 보며 다시 마음 아파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의 일이 사랑이기를 바라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진심으로 우리의 일이 사랑이기를 기도한다. 사랑이 힘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아이들 때문에 멈출 수 없는 사랑이 사실 쉽지 않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사랑 장애 아동들이기 장애 고아원 고아원 원장

2024-08-22

[삶과 믿음] 선택의 주요성

코닥은 한때 카메라 필름을 제작하는 회사로 미국 굴지의 기업이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개발한 것도 이 코닥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디지털카메라를 대량으로 생산 판매하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필름 판매가 급격히 떨어지지 않을까 주저하며 코닥은 계속해서 좋은 필름제작을 하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소니를 비롯한 다른 기업들이 디지털카메라를 개발 판매하기 시작하자 필름 시장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코닥은 위기를 맞습니다. 코닥은 시장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개인에 있어서나 회사 혹은 국가에 있어서나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사람들이 바른 실행을 하지 못 하는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범, 우리 인류가 선(善)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지 못하며, 악이 그른 줄 알되 악을 끊지 못하여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로 들어가는 까닭은 그 무엇인가. 그것은 일에 당하여 시비를 몰라서 실행이 없거나, 설사 시비는 안다 할지라도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거나 하여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는 실행이 없는 까닭이니, 우리는 정의어든 기어이 취하고 불의어든 기어이 버리는 실행 공부를 하여, 싫어하는 고해는 피하고 바라는 낙원을 맞아오자는 것이니라.”   어떤 일을 당해서 (예를 들어 사업상에 어떤 결정을 할 경우)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내 마음이 우선 편안하고 안정이 되어 있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필자의 경험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 어떤 말을 하거나 결정을 내리면 그것이 잘못된 결정 혹은 언행이 될 경우가 많았습니다.   칭기즈칸의 젊은 때 일입니다.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가까스로 위험을 벗어나 어떤 우물 옆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칭기즈칸은 목이 말라서 우물물을 먹기 위해 우물가에 있는 바가지에 물을 길었습니다. 그 순간 자기를 따라다니는 매가 날라와서 바가지를 차서 물을 엎질러 버렸습니다. 다시 우물에서 물을 퍼서 먹으려고 하는데 또 매가 날아와 물을 엎질러 버렸습니다. 다시 물을 퍼서 먹으려고 하는데 매가 날아와서 바가지를 깨자 칭기즈칸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칼을 빼내어 그 매를 죽였습니다.     매를 죽이고 보니, 길이 잘든 그 매가 왜 그런 행동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물 밑을 보니 독뱀이 죽어 있었습니다. 동물 직감으로 그 매는 물의 독성분을 알아 자기 주인을 살리려 한 것입니다. 이미 죽은 매를 살릴 수도 없고… 칭기즈칸은 자기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 어떤 판단과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큰 교훈을 얻고 그 이후로 이를 평생 실천했다 합니다.     칭기즈칸은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치와 전쟁에서 수많은 현명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단기간에  몽골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겠습니까?   흐르는 물에 달 모양이 정확히 담기지 않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야 지혜가 생기고 바른 판단이 나와서 일의 시비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취사를 하지 못하는 두 번째 요인은 “설사 시비는 안다 할지라도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라고 원불교 경전에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행복과 성공으로 이끄는 지혜로운 선택임을 알지만 ‘욕심’에 끌려 바른 취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건강해지는 법을 잘 압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거나, 음식을 골라서 적당히 먹고 과로하지 않고 등등. 그러나 게으름, 하기 싫음 등 육신의 욕망에 끌려 바른 취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를 잘 알지만 실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할 일을 미루거나, 적당히 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육신의 욕망에 끌리고 안일을 원하는 욕구에 굴복해서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 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주요성 선택 필름 판매 실행 공부 필름 시장

2024-08-15

[삶과 믿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이티에서 고아 구호 사역을 16년째 하는 우리 단체의 표어는 ‘신나는 심부름’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일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도 한다. 고아들의 식량을 공급하고 공부를 가르치는 일은 분명 신나는 일이지만, 이 심부름은 끝이 없다. 먹는 일은 멈출 수 없고, 배우는 일도 중단할 수가 없다. 나라가 고아들이 살아가기에 너무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는 고아들을 돕는 일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그 끝이 언제일지 가늠할 수 없다.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일이지만 16년을 먹이고 가르쳤으면 뭔가 이룬 것이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 그저 살아왔고, 아이들이 컸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세상에 나아가 어른이 되었고, 어떤 아이는 직업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미 오래전에 잊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살길을 못 찾아 고아원으로 되돌아간 아이도 있고, 고아원을 나갔다가 미혼모가 되어 다시 돌아온 아이들도 있다. 어쩌면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우리를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와 만나 추억을 더듬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고아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결과를 받아 들고 자랑스러워하거나, 커다란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아이티에서는 여전히 갱단의 횡포가 수그러들지 않고, 유엔 경찰이 들어와 치안을 돕고 있는데도 지난 몇 주간 갱단 때문에 또 많은 희생이 발생하기도 했다. 안전 문제로 코로나 이후 고아원을 직접 방문한 것이 거의 4년쯤 되어간다. 대신 갱단이 좀 조용할 때 우리는 고아원 아이들을 불러 선교센터에서 도시락을 나누고, 건강검진도 하며 만난다. 그렇게 몇 년 혹은 몇 개월 만에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이 눈에 띄게 자란 것을 보게 된다. 변변찮은 식사지만, 넉넉하지 않아 굶기도 하고 아껴 먹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자란다. 학교에 가는 날만큼 못 가는 날도 많지만, 아이들은 글씨를 읽고, 이름을 쓰고, 숫자를 세며 자란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우리는 이 일을 멈출 수 없다. 물론 이 일은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 같아서 끝이 없기에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가난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하고, 언제나 모자라는 식량 때문에 애를 태우기도 한다. 하지만 늘 맑은 눈과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만나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 아이들이 잘 자라서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계속 도울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한다.   사랑은 넘치고 흘러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죄인을 구원하셨다. 오직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절대로 맞교환의 가치를 계산할 수 없는 아들과 죄인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고, 아들을 내어주고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게 했다. 이렇듯 사랑은 머뭇거리지 않고, 조건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이 넘친다고 덜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랑은 낭비하는 것이다. 낭비처럼 여겨지더라도 멈추지 않고 쏟아붓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랑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고, 이렇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서 아이들이 꿈을 꾸며 자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밑 빠진 독에서 콩나물이 자라듯 아이들이 자라 세상을 변하게 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고아원 아이들 우리 사랑 고아 구호

2024-08-08

[삶과 믿음] 끼니

몇 주 전, 경상북도 구미시의 한 식당에 “폐지 줍는 어르신들 라면 무료”라는 내용으로 붙은 안내문이 인터넷에서 화제였다. 폐지를 주워 용돈을 버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라면을 무료로 끓여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노령 인구의 삶의 질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라면 한 그릇 따뜻하게 대접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면서 많은 네티즌이 감동의 댓글을 남겼다.   세상에는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도 ‘식사하셨느냐’는 물음이 가장 대중적인 인사말이었던 적이 불과 수십 년 전이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이제는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에서조차 끼니를 해결할 수 없어서 눈물 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세계적으로 보면, 빈곤의 아픔 속에 끼니를 체념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돈이 많아 주체를 못 하는 사람을 찾기보다 훨씬 쉽다. 세상이 발전하고, 점점 더 살만해진다고 해도 빈곤으로 끼니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가장 빈곤율이 높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1100만 명이 넘는 인구의 절반은 기아로 허덕이고, 어린이 수십만 명이 영양실조의 위험에 처해 있다. 아이티에는 정부가 통계를 내지 못할 만큼 많은 고아가 있다. 하루 한 끼를 장담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고아로 산다는 것은 끼니를 채울 수 없는 삶의 바닥 중 가장 아래 어디쯤에 아이들이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티에서 고아의 삶이란 굶는 일이 일상이란 뜻이다.   아이티 고아원에서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가 바로 ‘끼니’이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중략)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 새 없이 밀어닥쳤다.” 끼니 앞에서 무기력하면 삶은 가장 비참해진다. 먹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고 연장할 수 없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   하루 한 끼는 쌀밥을 먹을 수 있게 하자고 시작한 우리의 목표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끼니 앞에 때로 모래성처럼 무력해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라고, 숫자는 늘어나는데 후원은 한정되거나 오히려 줄어든다. 공급되는 식량을 나누다 보면 밥이 옥수수죽이 되고, 죽은 물이 되기도 한다. 하루 두 끼 식사 중에 아침에 죽 먹고, 저녁에 물 마시고 잠들어야 하는 절대 빈곤 가운데 때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끼니는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공급하는 우리 모두를 두렵게 한다.   생활이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라면을 무료로 대접하겠다는 경북 구미시의 식당 주인은, “배고프면 먹어야 하지 않나. 배고프면 눈물 나는 게 사람인데 밥이라도 한 끼 먹어야 살아갈 수 있지 않냐”고 했다. 아이티 아이들은 배고파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울어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배고픔은 아이들에게는 눈물조차 메마른 두려움이다. 사람은 끼니때가 되면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먹어야 한다. 아이티에서 우리는 쉬지 않고 밀어닥치는 끼니의 두려움을 이기는 꿈을 꾼다. 하루 두 끼 끼니를 거르지 않고 삶이 행복해지는 꿈을 계속 꾸고 있다. 조 헨리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끼니 아이티 고아원 아이티 아이들 경상북도 구미시

2024-07-25

[삶과 믿음] 선택이 운명을 좌우한다

빌 게이츠가 대학교 3학년 때 하루는 아버지에게 상의드릴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진지하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니 빌 게이츠 아버지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빌 게이츠는 아버지에게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이 자기 관심이고 열정이며 이를 위해 대학을 중퇴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하버드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고 혹시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으니 그래도 대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쉽게 승낙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Now or Never” 지금 아니면 미룰 수가 없고 지금 해야 한다고 말하고 하버드를 3학년을 중퇴하고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듭니다.     우리가 미국에서는 영어로 소통하듯, 컴퓨터를 이용할 때 빌 게이츠가 이때 만든 소프트웨어를 전 세계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1세기 가장 성공적인 기업이 됩니다. 빌 게이츠는 대학을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든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개인에 있어서나 회사 혹은 국가에 있어서나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사람들이 바른 실행을 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범, 우리 인류가 선(善)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지 못하며, 악이 그른 줄 알되 악을 끊지 못하여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로 들어가는 까닭은 그 무엇인가. 그것은 일에 대하여 시비를 몰라 실행이 없거나, 설사 시비는 안다 할지라도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거나 하여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는 실행이 없는 까닭이니, 우리는 정의어는 기어이 취하고 불의어는 기어이 버리는 실행 공부를 하여, 싫어하는 고해는 피하고 바라는 낙원을 맞아오자는 것이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지혜롭고 바른 취사를 하지 못하는 첫째 이유는 ‘일에 당하여 시비를 몰라서…’ 즉 어떤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옳음과 그름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내 백성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한 선지자 말씀입니다. (호세아 4:6)   원불교 정전 ‘고락의 법문’에서도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첫째 원인을 “고락의 근원을 알지 못함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옳은 일, 불리한 것은 그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자기 이해가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한때 한국에서 한 코미디언이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책을 써서 회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좋지 않은 음식을 먹는다고 건강이 금방 나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음식이 분명 우리 몸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의 옳은 혹은 그른 행동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초래합니다.   한 경찰이 자기와 친분 있는 한 스님께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은 경찰로서 도굴꾼을 체포하는 담당이었습니다. “스님, 전 불교 신자는아니지만 부처님의 인과 진리 말씀은 확실히 믿습니다. 과거에 도굴꾼들이 값비싼 유물을 도굴해서 몰래 팔아 큰돈을 버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잡혀 번 돈을 다 빼앗기고 결국 패가망신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그들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식까지 망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심은 데로 거두는 것이 인과의 진리입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에게 천만가지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 천만가지 선(善)을 다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니라.”   필자의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어떠한 법문을 믿지 않아도, 짓는 데로 받는다는 인과 진리 만은 꼭 믿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선택 운명 게이츠 아버지 인과 진리 대종사 말씀하시기

2024-07-18

[삶과 믿음] “하나님 여기 계시니…”

아이티를 다녀왔다. 공항이 폐쇄되었다가 다시 문을 열고, 항공기들이 다니기 시작해서, 4개월 만에 아이티 땅을 밟았다. 공항 옆에 유엔에서 파견한 케냐 경찰 막사가 설치되고 거리에는 아직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는 하지만 뜨거운 햇살 아래 많은 사람이 길거리 장사에 나서서 사람 통행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은 붐비고 있었다.     갱들의 위협으로 비행기가 오 가지 못하던 시간 동안 아이티 수도 포토프린스는 고립되어 있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보내는 헬리콥터 몇 대가 갱이 점령한 도시를 탈출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그마저 금방 끊어지고 말았다. 그 고립된 시간 동안,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봉투에 담아 파는 쌀이나, 길거리 행상이 파는 달걀, 플랜틴 정도로 연명해야 했다. 우리가 후원하고 있는 고아원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의 숫자는 늘어나고, 날이 다르게 자라는데 한정된 식량으로 한 달 한 달을 간신히 버텨내야 했다.   이번 방문에서 살렘고아원 원장인 쟌 목사를 선교센터에서 만났다. 16년째 후원하며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는 그에게 미안하고 슬픈 마음으로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그 사이 잔주름이 확 늘어 더 늙어 보이는 쟌 원장은 거침없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한 번 가리키고, 땅을 한 번 가리키더니, “하나님이 여기 계시니…” 했다. 두려움과 배고픔과 슬픔의 시간 동안 하나님이 계셨다고 했다.   우리는 늘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아이티를 평화롭게 해 주시기를, 아이티 사람들이 갱들의 폭력,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고, 더없이 삶이 고단한 고아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배고픔을 덜어주시고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이들에게 적절히 도움이 전달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아이들이 어떻게든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늘 의심받았다. 아이들이 꿈을 잃지 않고 자라기에는 나라가 너무 황폐했다. 사실은 후원도 조금씩 줄어드는 고아원 지원은 힘에 부치기도 했고, 아이티는 점점 더 상황이 나빠지고 있기도 했다. 끝을 모르는 고난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었다. 매일 소망을 꿈꾸자고 하며 기도한다는 우리마저 먼 미래의 아이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사역이 아니라 사랑이다. 소망을 잃은 것 같은 거친 땅 아이티에서 사는 ‘고아’를 사랑하는 일이다. 고아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주신 아이들이라고 믿고 있기에 그 사랑은 몹시 거룩하고 숭고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힘든 과정을 거쳐 아이들을 만나고 안아주고 사랑을 나누어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 듯 상황이 점점 나빠진다고 여겼다.   그때 쟌 목사를 통해 들었다. ‘하나님 여기 계시니’.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거기 계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른 아이들을 도와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거기 계셨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고난을 겪을 때,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을 만나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아이티 땅 두려움과 슬픔과 배고픔이 가득한 고아원에 아이들과 함께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임마누엘로 오셨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자주 ‘여기’ ‘지금’ 함께 계신 하나님을 잊고 산다. 조항석 / 목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하나님 계시 하나님 여기 고아원 지원 아이티 사람들

202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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